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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6회 작성일 -1-11-30 00:00
회룡사(경기)
  • 분류 사찰
  • 지역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 주소 경기도 의정부시 전좌로155번길 262 (호원동)
  • 전화번호 031-873-3391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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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정보
서울에서 의정부로 가는 전철 1호선에는 망월사역과 회룡역이 있다. 바로 사찰명을 그대로 역사의 이름으로 쓰고 있는 것인데, 그만큼 이 두 사찰은 이 지역에서는 의미있고, 유서 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절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을까? 여기에는 조선의 개국(開國)과 초기 격동의 역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 한자를 그대로 풀어 본다면 용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용`은 바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말함이다. 1881년(고종 18)에 우송(友松)스님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는 1398년(태조 7)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왕사인 무학을 방문했는데, 무학은 1394년에 정도전(鄭道傳)의 미움과 시기를 받아 이곳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현재 회룡사(回龍寺)는 북한산의 대표적인 비구니사찰로 여러모로 관음도량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때문인지 경내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석조관음보살상이다. 1987년 조성하였다는 이 관음보살상은 북한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을 위해 봉안했다고 한다. 등산객들이 등산화를 벗고,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이 보살상을 세워 지나는 도중에도 가벼이 예를 올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편 회룡사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백일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일체중생의 어떠한 어려움도 구제해준다는 관세음보살. 바로 회룡사의 비구니스님들에게서 이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지는 않을까? * 창건배경 및 역사 회룡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신라 때 초창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에 창건되었다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우선 1977년 봉선사에서 발행한 『봉선사본말사약지(奉先寺本末寺略誌)』에 의하면 절은 681년(신문왕 1) 의상스님이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불렀다고 한다. 창건 이후에는 930년(경순왕 3)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재창하고, 1070년(문종 24) 혜거국사(慧炬國師)가 3창하였으며, 다시 1384년(우왕 10) 무학대사(無學大師)가 4창하고, 1403년(태종 3)에 회룡사로 고쳐 불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무학대사 이전의 사실은 전하는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권상로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하권의 회룡사항에는 한결같이 무학대사에 의하여 1384년(우왕 10) 또는 1395년(태조 4)에 처음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상반됨을 볼 수 있다. 또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양주목 불우조에도 망월사·영국사 등과 함께 도봉산에 있는 절로 나와 있어 무학대사의 창건설이 더 신빙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조선 초기의 무학대사에 의한 창건 이후 절이 어떤 변천을 거듭하였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는 없으나 1630년(인조 8)에 예순(禮順) 비구니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해지며, 조선 후기까지 폐사되지 않고 법등을 이어 왔음은 정조 때 편찬된 『범우고(梵宇攷)』를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조선 후기의 연혁은 1881년(고종 18)에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와 사성(師誠, 1836~1910)의 문집인 『극암집(克庵集)』에 나오는 「양주도봉산회룡사중수기」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세월이 지나면서 절이 퇴락하자 1878년(고종 15)에 혜봉 최성(慧峯 最性)이 상궁 박씨의 도움으로 절을 크게 중수하였고, 1881년에는 경해당 원삼(慶海堂 圓三)과 함께 유명한 장인들을 모아 당우와 요사를 새로 지었다. 또 이때 채사(彩師)들을 초빙하여 지장탱, 신중탱, 현왕탱과 무학대사의 진영을 조성했는데, 시주자는 상궁 하씨와 조씨 등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938년 비구니 순악(順岳)스님에 의하여 요사 건립 불사 등이 이루어 졌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절은 폐허가 된다. 이후 도준(道準)스님이 1954년부터 복구에 착수하여 연차적으로 승당과 대웅전, 약사전, 선실, 요사 등을 복원하였다. 1971년에 대웅전을 새로 짓고, 1987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봉안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범종각을 지어 사물(四物)을 조성 봉안하였다. 또 1996년에는 혜주(慧珠)스님이 극락보전과 삼성각, 노전채를 새로 지었으며, 2000년에는 선원인 취선당(聚禪堂)을 개축하였고, 2001년에는 성견(性見)스님이 삼성각을 증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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