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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당은 건물은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인 지산(芝山)조호익(曺好益) 선생의 7세손이며 정조5년(1781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曺學臣, 1732~1800) 선생이 살던 집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에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은 주택에도 영향을 미쳐 한 집안 내에서도 남녀의 처소를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하였으며 조상에 대한 제례를 중시하여 사당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 집은 안채와 중사랑채 및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사당 뒤쪽에는 신주를 모셔다 제사드리는 별묘(別廟) 및 보본재(報本齋) 등이 배치되어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집 뒤의 마을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은 선생이 손수 심어 이루어낸 것으로 전한다.
* 수량 - 목조와가 * 소유자 - 조익현 치재 선적(善迪)의 아들로 태어남에 도량과 사람됨이 뛰어나다.
1759년에 영조의부름에 나아가 칼 쓰는 시합을 보였더니 임금님이 장하다고 크게 칭찬하여 사복(司僕) 내승(內乘)으로 임명하였다.
내직으로는 국가의 중요직책을 맡았고, 밖으로는 여러 골의 목사(牧使)로 지냈다.
선생이 백성을 다스림에 정성을 다하니 정조께서도 높이 칭찬하여 규장각지(奎章閣誌)와 대전통편(大典通偏)등을 각각 1부와 말 한필을 하사하였다.
세상을 하직함에 임금으로부터 부조와 제문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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